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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12일 세기모 4차모임 후기

시간: 2024112() 103015

모이는 장소: 예닮교회

참석자(13): 강대윤, 강용한, 권호진, 김경훈, 김선영, 김영일, 김주연, 윤여철, 이웅수, 장천, 정창섭, 정희전, 한은석

 

오늘 세기모(세상 기원의 모든 것)의 네번째 모임은 예닮교회에서 가졌으며 모두 13명이 참석하였다. 1015분에 지하철 4호선 한성대역 7번 출구에서 모여 1030분경 예담교회에 10명이 모였다. 훌륭한 예담교회 회의실에서 지난 2주에 이어 이번 주도 한은석 부인이 고맙게도 모임을 위한 다과도 마련해주고 회의 장소도 정리해주었다.

 

이번 모임에서는 1시간 발표하고 10분간 토의 및 휴식하고 다시 한시간 발표하고 토의하는 형식으로 진행하였다. 오늘의 주제는 김경훈이 <신명재판><낙하산>의 기원과 역사에 대해 발표하고, 이어서 정창섭이 <최부 표해록>에 대해 발표했다. 최부 표해록의 후기 부분은 정창섭이 작성하고 나머지는 김경훈이 작성하였다.

 

1)신명재판

신명재판은 피의자의 유죄 여부를 하느님의 개입에 의존하여 가려내는 중세 기독교 사회의 재판 방식을 이른다. 게르만 사회에서 기원하여 프랑크 왕국, 특히 카롤루스 왕조 때부터 기독교 사회에 통합된 이 재판 방식은 1215년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에서 공식 폐지하기 전까지 민형사상 분규를 해결하는 공인된 방식이었다. 신명재판은 피의자의 유죄 여부를 밝혀내는 한 방법으로서 재판의 초두부터 실행된 것이 아니라, 자백이나 증인이 없을 때 실시한 최후수단이었다.

 

소송은 피해자의 고발이 있어야만 성립되는 당사자주의를 따랐는데 피의자의 자백과 목격자의 증언(구두 증언과 간혹 서증)이 주요 증거로 채택되었다. 그러나 고발된 절도, 살인, 강간(간혹 간통), 이단, 마법과 같은 은밀한 범죄에 대해 피의자의 자백과 증인이 없을 때 최후수단으로 신명재판에 의존했다. 여기서 만약 피의자가 무죄로 판명나면 고소인은 고발한 범죄와 동일한 처벌을 받았다. 그러므로 고발이 매우 어렵게 되어 있고, 재판관은 심문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역할이 매우 제한적이고 수동적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신명재판은 피의자만 시험 받는 일방 신명재판과 고소인과 피의자가 다 시험 받는 쌍방 신명재판으로 크게 구별된다. 일방 신명재판은 다양한 형태가 있다.

 

2) 낙하산

진정한 낙하산에 대한 최초의 증거는 르네상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장 오래된 낙하산 디자인은 1470년대 르네상스 이탈리아(영국 도서관)의 익명 원고에 나타나 있으며, 한 쌍의 스케치는 낙하산에 대한 두 가지 초기 아이디어를 보여준다. 안전 조치로 막대 끝에서 허리 벨트까지 4개의 끈이 연결되어 있다. 디자인은 두 개의 막대에 고정된 두 개의 긴 천 깃발을 사용하여 추락의 힘을 극복하려는 남자를 묘사하고 있다. 박식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보다 정교한 낙하산을 스케치했다. 여기서는 낙하산의 크기가 점퍼의 무게에 비해 더 유리한 비율을 차지한다. 낙하산의 모양을 원뿔형에서 피라미드형으로 변경하는 정사각형 나무 프레임이 레오나르도의 캐노피를 열어 놓았다.

 

베네치아 박식가이자 발명가인 파우스트 베란치오는 다빈치의 낙하산 스케치를 조사하여 사각형 프레임을 유지했지만 캐노피를 부풀어 오른 돛 모양의 천 조각으로 교체하여 낙하 속도를 더 효과적으로 늦추었다. 현대 낙하산은 18세기 후반 프랑스의 루이 세바스티앙 레노르망(1757-1837)에 의해 발명되었으며, 그는 1783년 최초로 공개 점프를 기록했다. 레노먼드는 또한 자신의 장치를 미리 스케치했다. 그는 프랑스의 화학자, 물리학자, 발명가, 수도사이자 낙하산 분야의 선구자였다. 이후 낙하산은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꾸준한 발전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렀다.

 

3) 최부 표해록

지난해 9월 남파랑길에서 해남의 고산 윤선도 기념관, 녹우당을 보고 인근에 있는 해남 땅끝 순례문학관을 들렀다. 해남문학의 뿌리 최부의 표해록이 맨 상단에 있어 나의 눈을 끌었다.

 

최부가 어떤 인물이기에 해남 시문학의 고시조일까? 그의 사숙을 받은 윤효정, 임우리, 유계린 이어지는 윤구, 윤선도, 임억령 유성춘, 미암 유희춘의 학맥이 대단하다. 500년 전 뿌린 시가의 맥이 초의선사의 시에서 빛을 발하고 현대에 이르러 이동주, 박상룡시인, 김남주,고 정희시인 등으로 이어져 해남은 시문학의 산실, 시문학의 저수지로 불리어 지고 있다.

 

해남문학의 씨를 뿌린 [최부의 표해록]을 주제로 세기모에서 발표했다. 표해록은 조선 성종 때 문신 최부(崔溥·1454~1504)가 배를 타고 제주에서 나주로 가던 중 표류해 중국 남쪽 지역에 표착했다가 북경으로 이송된 후 조선의 한양으로 돌아오기까지 약 6개월 간, 3500km의 여정을 기록했다. 321책으로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돼 있다서울대 고병익 교수는 금남 표해록은 우리나라가 갖는 여행기록중에서 난파와 표착 그리고 이국 내륙의 호송.귀국이라는 희귀한 여행기록이다. 15세기 명대 중국의 해안 왜구에 대한 방비상황, 지방관청의 실제 운영상, 주민의 생활상, 관리와 지식 층의 관심사 등을, 최부가 동국통감의 수찬에도 참여한 인물이기에 그런 해박한 견식과 능숙한 필치로 기술할 수 있었다중국 학계는 외국인이 기록한 세계 3대 중국 기행문의 하나로 표해록을 꼽았다. 북경대 거전자 교수는 표해록을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를 능가하는 최고의 중국기행문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 이유로 표해록이 운명과 맞서 싸우는 분투정신, 국가 이익을 우선적으로 고려한 애국정신, 환관이 발호하는 명대의 정치를 질타하는 비판정신 등을 들었다.

 

표해록은 우연히 쓰여 졌다. 최부는 14879, 도주 노비나 범죄자를 잡아들이는 일을 하는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이 돼 제주에 파견됐다. 이듬해 부친상을 접하고 제주 수정사 주지의 사선을 빌려 타고 일행 42명과 함께 제주 별도포(화북포)를 떠나 고향 나주를 향해 출범했다.  

 

최부 일행은 추자도 인근 해역에서 풍랑을 맞아 표류했다. 폭풍우와 기갈, 선원들과의 갈등, 해적의 위협 등 생사를 넘나드는 사투 끝에 표류 13일 만인 116일 절강성 임해현에 표착했다. 처음에는 왜구로 오인 받아 붙잡혀 사형 당할 처지에 놓였으나 다행히 정직한 중국 관리의 도움으로 조선 관원 신분이 확인돼 송환 절차에 따라 북경으로 이송되게 됐다.  최부 일행은 항주와 소주를 거쳐 양자강을 건넜다. 이 과정에서 조선 사대부가 가보고 싶어 하는 중국 강남과 대운하를 처음 경험하는 행운을 갖기도 했다. 양주-회안-서주를 지나 북경에 도착해 명나라 황제 홍치제(1470~1505)를 알현했다. 그 자리에서 최부는 선비로서 품격을 잃지 않았고, 상복을 벗지 않으려 하다가 양보를 한다. (149일 중 상복을 벗고 길복을 입은 유일한 날) 그런 모습에 감탄한 홍치제가 상을 하사하고, 한양까지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배려했다. 조선으로 돌아온 최부에게 성종이 서책으로 기록하도록 지시해 청파역에서 1주일 만에 표류의 전 과정을 기록하여 표해록이 나왔고, 성종은 국위선양을 치하하며 옷을 하사했다. 표해록을 통해 중국 명대 연안의 해로, 기후, 산천, 도로, 관부, 풍속,민요 등과 강남. 강북의 특징을 비교 분석하였고, 수차의 제작과 이용법을 소개해, 이후 충청도 지방의 한발 때 이를 사용하여 많은 도움을 주었다.

 

민족의 역사를 수놓은 빛나는 별 가운데 한결 영롱하고 애절한 이름이 있으니, 금남 최부 선생이 바로 그다. 그 영롱함은 탁월한 재질과 염결(廉潔, 청렴하고 결백함)한 성품과 성충(誠忠)으로 나라에 봉사하고 열성으로써 후학을 훈도한 공적으로서 빛나는 것이요, 그 애절함은 천부의 능력, 만장(萬丈, 한없이 높음)의 기염(氣焰, 불꽃같은 기세)을 펴지 못하고 50년의 짧은 생애를 형사(刑死)로 매듭지어졌다는 사실을 말함이다. 민족의 한은 역사의 도처에 깔려 있는 것이지만, 최부의 생애와 행적을 살피게 되면 특히 그 한이 애처롭다. 어찌하여 이러한 대재(大才)를 민족의 거목으로 가꾸지 못했던가. 어찌하여 나라를 위한 성충(誠忠)이 나라 전체에 널리 퍼지도록 받들지 못했던가. 그러나 표해록 한 권을 남긴 것만으로도 우리에겐 매우 다행이다. 수백 수천의 기행기 가운데서 표해록은 단연 빛난다.”(이병주 선생 글)

 

회합 후 중국집에서 중식으로 점심을 먹고 카페로 옮겨 즐거운 대화와 토의 시간을 가졌다. 카페 경비는 오늘 게스트로 참석한 권호진이 모두를 위해 부담하였다. 다음 발표는 216일에 김경훈과 김영일이 맡기로 하고 해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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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화를 지연시키는 명약이 호기심이라는데 모두 건강 백세의 복을 누리시길.
    잘 정리되어 두고두고 좋은 자료로 활용할 수 있어 좋아요. 드분 수고 많았어요. 갈수록 세기모가 흥미롭고 재맜어요.
    세상 모든것의기원찾기, 호기심이 마구 생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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