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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인터뷰 – “경희궁터의 추억, 응답하라 1974 !!”

서울역사박물관 인터뷰경희궁터의 추억, 응답하라 1974”

날짜, 시간 : 2020.7.13 15:00 ~17:30

모임 장소 : 경희궁 흥화문, 숭정전, 서암, 서울역사박물관 회의실

참석자 : 26 동기 : 김민주, 김선영, 김영일, 장천, 정창섭, 한준, 윤여철

              서울역사박물관 : 김양균(조사연구과장), 정수인(큐레이터) 1

 

오늘 우리 동기들 명이 역사박물관 관계자들과 인터뷰를 하게 배경은 두어 김민주 동기와 송인호 서울역사박물관 관장이 경희궁의 역사고찰에 대한 얘기가 있었다고 한다. 경희궁은 선조의 아들인 광해군시절 지어진 조선의 5번째 궁궐로써 현재 서울역사박물관도 자리에 있지만, 다른 궁들에 비해 경희궁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고 궁궐 복원도 미진해 박물관장 재임 중에 경희궁 심층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해 책자를 만들 계획이고, 필요하다면 경희궁 특별전도 열고 싶다는 포부를 들었다. 특히 경희궁에서 학창생활을 했던 서울중고 졸업생들의 기억을 듣고 싶다는 박물관장의 의견이 나와 기꺼이 경희궁에 대한 우리들의 작은 input이라도 주고 싶은 마음에 오늘의 만남이 성사되었다..

 여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씨였지만 우리 동기 7명과 역사박물관 직원 2명이 흥화문에서 모여 우산을 쓰고 경희궁 탐방을 시작했다. 내리는 비를 피해 숭정전 회랑에서 경희궁의 역사와 복원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상서로운 바위라는 뜻을 가진 <서암 (瑞巖)> 찾아갔다. 조선역사에도 가끔 등장하는 서암은 광해군시절 김일룡이라는 술사가 새문동 (지금의 경희궁 자리)에서, 특히 기묘하게 생긴 거대한 바위, 서암에서 왕기가 서린다고 보고해서, 당시 경희궁자리에 살던 광해군의 이복동생, 정원군의 집을 강제로 빼앗아 여기에 경희궁을 지었는데 (1617~1620),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쫓아버린 인조가 정원군의 아들이었으니 술사의 예언대로 새문동에서 왕이 나온 것도 역사의 아이러니일까? 숙종은 경희궁에서 태어나 승하할 때까지 재위 46년 포함 전 생애 (60년) 를 경희궁에서 보낸 임금이었으니, 장희빈과의 사랑도 이곳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우리가 3~6년을 경희궁 터에서 생활하면서 한번도 들어본적도, 본적도 없었던 서암은 친구들과 위치를 파악해보니 신관 뒤쪽 산속에 있었기에 우리가 전혀 몰랐던 것이 아닐까? 심지어 고등학교 역사 선생님들에게서도 서암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는 같다. 최근 인기있는 Netflix 시리즈 드라마, <킹덤>에서도 서암을 배경으로 장면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경희궁에서 기념사진 찍은 , 우리는 본격적인 인터뷰를 하러 예전의 2운동장 자리에 위치한 역사박물관 회의실로 향했다. 코로나19 사태 때문에 아직도 역사박물관은 폐쇄되어 적막이 흘러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회의실에서 2시간 진행된 인터뷰에서 박물관측의 주요 3가지 질문은 1) 서울고등학교 교내의 기억, 2) 서울고등학교 학생 생활, 3) 서울고등학교와 신문로2가의 관계성 등이었다. 질문이 나오자마자, 친구들의 입을 통해 학창시절의 수많은 에피소드가 끊임없이 나와서 우리 모두 50 전의 학창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가지를 정리해 보면 ;

우선, 우리들의 생생한 기억 속에 있는 도서관 뒤에 있던 방공호, 그래서인지 박물관사람들의 번째 질문도 방공호에 대한 것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 모였던 동기들 실제로 속에 들어가보았던 친구는 아무도 없었다. 왜냐하면 선생님들이 방공호에 대해서는 너무 심하게 겁을 주시고, 예를 들어 들어가면 입구에 밑으로 한없이 빠지는 함정이 있다는 , 너무 엄포를 주어서 감히 들어가볼 엄두를 못했던 같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니코틴 충전이 필요하면 거기에 들어가서 연기를 뿜어댔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던 친구도 있었는데…. 오늘 만났던 박물관 관계자의 말을 들어보니, 방공호는 그렇게 길지도 않고 (우리 학교 다닐 때는 방공호가 청와대까지 연결되어 있다는 소문까지 돌았으니까) 기역() 모양 아주 단순한 구조의 짧은 방공호였다고 했다. 너무도 순수했던 우리들은 선생님들 말을 그대로 믿었었나 보다.

경희예술제를 대비해 선배들한테 빠따 (정말 야구방망이로 때렸을까?) 맞아가며 늦도록 연습했던 밴드반 김선영의 추억을 들어보자. 빠따 세례에 살에 들러붙은 속옷을 교내에 흐르던 시원한 약수물을 적셔가며 떼어냈다나? 그래도 혹독한 연습 덕분에경희예술제에서 수많은 여학생들의 박수세례를 받지 않았을까? 밴드반의 거리행진 때는 반드시 이화여고 앞을 지나갔고, 거기에서는 유난히 북과 나팔에 힘이 들어가 더욱 웅장하게 울려대고, 여학생들은서울 오빠들 최고!!” 특히 체격 좋은 선영 오빠~~” 외쳐댔겠지? 박수를 받는 기쁨에 밴드반 친구들은 빠따 맞으면서도 아픈줄 몰랐겠지? 이화여고 근처의 B고교 학생들은 얼마나 질투기 났을까? 위치상으로 보더라도 우리는 3 명문여학교 (경기, 이화, 서울예고) 바로 이웃하고 있었고, 실제로 이들 학교의 여학생들과 많은 서클활동이 있었는데, 당연히 신문로에서 멀리 있는 경기, 경복고 학생들의 많은 부러움을 받았을 것이다. 우리의 국방색 여름 교복과 칼라, 그리고 바지주머니 없는 단정한 교복, 비록 겨울에는 손이 많이 시렸고 여름에는 바람이 통하지 않아 많이 더웠지만, 우리는 적어도 광화문 거리에서만큼은 멋진 사나이 들이었다오.

서울고등학교에서 교장을 했던 장천 동기는 서울고 출신들이 깨끗하자, 부지런하자, 책임지키자 라는 우리의 교훈을 철저히 따랐기에, 서울고 출신은 지저분한 강도나 살인범이 없다고 자신있게 말하였다. , 오랜만에 들어보는 우리 학교의 교훈이었다. 역시 서울고 교장 출신은 교훈을 이렇게 멋지게 소개하는 재주도 있나 보다. 아마 전체조회 시간에 학생들에게 수없이 교훈을 강조했겠지? 서울고 동문이 그린 서궐도 (조선시대에는 경희궁을 서궐이라 불렀다) 서초동 본관에 걸게 사람도 당시 장천 교장이었다고.

우리의 로맨티스트 김영일동기는 학교 근처의 맛집들을 훤히 꿰고 있어서 완벽한 기억력에 우리 모두 놀랬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크라운제과와 덕수제과 뿐이 아니라, MBC근처에 있던 금잔디라는 분식집을 기억하는가, 무교동의미진이라는 메밀냉면집을 기억하는가? 이화여고 근처에 있는 칠레분식 (입구에서 주방까지 좁고 길어서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나?) 기억하는가? 아마 많은 동기들이 여학생을 만나기 위해 광화문 일대의 제과점이나 분식집을 헤매지 않았을까? 수줍음 많고 조용했던 나는 6 동안 한번도 여학생과 얘기해 본적이 없고, 겅희예술제 초청장도 끝날 때까지 책가방속에 있었고 그런 날에는 외로운(?) 친구들과 종로2 화신극장에서 화면의 나쁜 싸구려 영화 2 한꺼번에 보는 재미가 전부였던 같다. 예술제하는 만큼은 선생님들이 넓은 교정에 배치되어 사고치는 감시하느라고 종로의 영화관들은 우리의 해방구였다.

우리가 많이 들었던 김원규교장 션생님이 담을 넘어가던 학생을 쫓아가다가 다리를 다치셨다는 얘기, 그리고 선배들이 얘기하던 개구멍은 어디에 있었는가, 우리들의 생각은 신문로 쪽이 아니라, 3운동장 뒤쪽이었을 것이라는 결론이었다. 광화문쪽 코너에는 작은 후문이 있었고, 옆에는 신문로 파출소가 있었다고 하던데, 나는 전혀 기억이 없다. 그리고 신문로 큰길 담벼락에는 무허가 집들이 있었다던데, 이것 역시 나는 기억이 난다.

오늘 어떤 친구는, 아마 김영일이었나 보다, 학교앞 매점 주인, 나씨 아저씨 얘기를 했다. 우리에게는 마음 넉넉한 동네 아저씨 같던 , 준비물이 (예를 들어 스케치북이나 그림물감 ) 필요한데 가진 돈이 없으면 일단 가져가라고 하고, 물론 우리 동기들은 나중에 반드시 돈을 갔다 드렸지만. 이분은 우리가 대학 다닐 후배들 야구 응원하러 서울운동장에 가면 함께 소리치며 28 선우대영 투수를 응원했던 기억이 난다. 바로 옆의 이발소 스토리도 우리를 배꼽쥐게 만들었다. 어느 까칠한 생활지도부 선생께서는 방학되기 직전 우리들 머리에 고속도로를 내버려서 까까머리 때문에 방학생활을 망쳐버린 얘기, 그런데 그분이 우리 머리를 밀어댔던 바리깡이 교문옆 이발소에서 빌린 것이었다나, 그때도 공생공존이 있었나보다.

오늘의 인터뷰는 경희궁전체 수백년 역사에 비하면 기껏해야 3~6 동안 그것도학생들 입장에서 지극히 단편적인 것이고 그야말로 퍼즐의 일부라서, 서울역사박물관 담당자에게 상세한 기술을 위해서 우리 대선배님들하고도 인터뷰를 추진해서 1946 개교 당시와 50, 60년대의 신문로 모습들을 얘기해보라 했고, 현재 총동창회장이 26 이상림 동기인 , 직접 접촉해볼 것을 추천하였다. 물론 박물관측에서는 오랜 기간 신문로2가에서 살아왔던 주민들과도 인터뷰를 추진해서 내실있는 기록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친구들이 2시간 동안 흥겹게 추억하는 것을 모두 여기에 기록할 없는 것이 아쉽다. 66 먹은 중년의 친구들이 50 얘기를 거의 기억한다는 것이 놀라웠고, 우리들의 표정은 모두 10대의 어린 학생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아마 박물관측에서 시간을 주었으면 우리는 밤늦도록 옛날 얘기를 계속했을 것이다. 워낙 달변의 친구들이 흥미롭게 얘기해주어서, 정작 적십자 병원에서 태어나고 덕수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서울고등학교 건너편에서 살았던 나는 시간관계상 신문로에 대해 거의 얘기할 기회가 없어서 많이 아쉬웠다.

올해는 서울고등학교가 1980 서초동으로 이사간지 40년이 되는 해이고 그래서 우리 동창회보 금년 여름호에는 의미있는 기사가 많이 실렸다. 그동안의 역사를 간단히 정리해보면, 1915 일본인 학생들이 다니는 경성중학교가 생겨났고, 1945 해방후, 초대 김원규 교장선생님의 노력 덕분에 1946 서울중, 고등학교가 개교하였다. 1968 일류중학교 무시험 정책에 의해 서울중학교는 20 졸업을 끝으로, 1971 228일에 폐교되었고 (우리 26회의 2/3 해당하는 480여명이 서울중학교 마지막 졸업생), 1980 5 , 30 졸업생들이 3 우리 학교는 경희궁을 떠나 서초동에 새로운 둥지를 틀었다. 현대건설이 부지를 매입해서 사옥을 건설하려 했으나, 서울 시민들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다행히 1985 서울시가 매입해서 여기에 서울역사박물관 건립계획을 세워서 2002 5 21일에 정식 개관했다. 우리에게 국사를 가르치셨던 이존희 선생님께서 2001 4월부터 2 동안 서울역사박물관장으로써 경희궁에 근무하셨다는 사실을 아시는가?

우리 서울고등학교가 경희궁터에 없었더라면 이상한 건물들이 들어서거나 조각조각 팔려서 경희궁의 작은 흔적마저 영원히 사라졌을 테고 35 남짓한 짧은 기간이었지만 서울고등학교가 경희궁터를 굳세게 지켜주었기에, 지금의 경희궁복원 사업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더더욱 우리 모교에 대해 한없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2020 동문회보 여름호에 모교이전 40 특집기사로 실렸던 34 김정일 동문의 속삭임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 나의 경희여~ 젊은 날의 연인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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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서있게 정리하느라 고생 많았어요. 덕분에 경희궁 역사를 돌아보내요.감사해요~~
    두서 없는 옛이야기를 정리하느라 휴일도 반납하고...고생 엄청 많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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