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UNTER

  • 총 회원수
    595 명
  • 금일 방문자
    143 명
  • 총 방문자
    450,160 명

독서모임 ‘만권당’ 펄벅 기념관 방문기

독서모임 만권당펄벅 기념관 방문기

펄벅 기념관에서 펄 벅의 <大地>를 논하다.

지난 7월에 결성한 북클럽 만권당 4번째 모임은 펄벅의 <대지> 3부작을 논하는 자리, 우리4사람(김민주, 정창섭, 한은석 그리고 윤여철)10월의 마지막 수요일 (28) 오전 10시 용산역에서 만나 인천가는 급행 전철을 탔다. 화창한 가을 날씨, 출근 시간이 지난 전철 내부는 한산했고 창밖의 단풍과 낙엽을 보면서 느긋한 시간을 만끽했다. 부천역에서 내려 시간 절약을 위해서 택시를 타고 기본요금거리의 펄벅 기념관에 도착해서 부천시 문화관광해설사 이영숙님으로부터 펄벅기념관에 얽힌 몇가지 알려지지않은 스토리를 들을수 있었다.

펄벅은 <대지>로써 1931년 퓰리처상을 받았고, 1938년에는 여성작가 최초의 노벨문학상을 받은 미국 작가이다. 젊었을 때 대부분의 시간을 중국에서 보냈기에 스스로를 정신적 혼혈아라고 불렀던 펄벅은 1960년부터 한국을 8번 이상 방문하고 1년 이상을 한국에 거주하면서 전쟁중에 태어난 고아들 특히 혼혈아에 깊은 관심을 쏟기 시작해서 유한양행의 창업자 유일한 박사 (1895~1971)와의 특별한 인연으로 많은 도움을 받게되었다. 유박사의 중국계 미국인 부인 호미리씨와 펄벅 여사가 가까운 친구사이라서 자연스럽게 유일한 박사와도 연결되었던 것 같다.

1967년 유일한 박사가 기증한 유한양행 소사공장터 10,000평의 부지에 소사희망원을 세운 펄벅 여사는 훗날 수백명의 혼혈아이들이 참석한 개원식 날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술회했다. 펄벅 여사는 소사희망원 빈터마다 복숭아나무를 심어주어 불쌍한 고아들이 실컷 먹을 수 있게 해주었다. 어렸을 적 사회시간에 소사 복숭아가 유명하다고 배운 기억이 있고, 지금도 부천시에서는 매년 여름 복숭아 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해설사의 얘기를 들으며 몇 번인가 가슴이 뭉클해지는 느낌을 받았고, 유일한 박사와 펄벅 여사와의 아름다운 인연 때문에 여사가 한국을 배경으로 쓴 소설 <살아있는 갈대>의 주인공 이름을 김일한이라고 등장시킨 것이 아닐까? 처음 소사희망원을 건립할 당시에는 건물도 여러채 있었고, 여사께서는 여기에 목공소를 만들어 약 2,000여명의 혼혈 고아들의 자립심을 도와주었고 본인도 직접 2명의 혼혈아를 입양해서 미국으로 데려갔다고 한다. 성장한 원생들이 떠나면서 결국 소사희망원은 1976년에 폐원되고 많은 건물들이 헐리고 개인소유로 되고 뒷동산은 공동묘지로 변하고….. 그러나 다행히 1999년 부천시의회에서 펄벅기념관 건립을 추진키로 결정, 개인소유지였던 이곳을 부천시가 매입, 2005 5월에 공사가 시작되어 2006930 <부천 펄벅 기념관>이 문을 열게 되었다.

KBS 가요무대에 가끔 출연하는 혼혈가수 박일준, 외모는 외국인이지만 사실은 영어를 전혀못하는 토종 한국인 그리고 디바의 여왕 인순이까지 두 사람 모두 어린시절 펄벅 재단의 도움으로 성장한 사람들이었다고 설명하는 데에 한번 더 감격했다. 펄벅 여사가 한국을 여행하면서 보았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풍경은, 한국 농부들은 소달구지에 타지 않고 소와 함께 걸으면서 이동하는 것이 의아했는데, 농부들의 답변이 농부에게 소는 농사를 짓는 도구가 아니라 평생 농사일을 함께하는 동료라서 마차에 타면 친구가 힘들까 봐 함께 걷는 것이라고 했단다. 또 한가지,펄 벅 여사가 늦가을 감나무를 보니 따지 않은 감이 몇 개 달려있기에 이유를 물었더니 까마귀들이 추운 겨울내내 먹을수있는 양식을 조금이나마 준비해 준 것이라고. 그런 경험에서 펄 벅 여사가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쓴 소설 <살아있는 갈대>의 서문에 한국은 고결한 사람들이 사는 보석 같은 나라….”라고 극찬하였다.

KakaoTalk_20201028_204054009_17.jpg

KakaoTalk_20201028_204054009_04.jpg

KakaoTalk_20201028_204054009_03.jpg

KakaoTalk_20201028_204054009_05.jpg

KakaoTalk_20201028_124122811_01.jpg

펄벅 기념관 뒤에 있는 정자에서 우리 네 사람은 <대지> 3부작에 관해 진지한 토론을 진행했다. <대지> 3부작은 주인공 왕룽과 오란 부부와 그 자식들의 3대에 걸친 인생을 그린 작품으로 1 <대지>, 2 <아들들>, 3 <분열된 일가> 3권으로 구성된 1,200 페이지가 넘는 장편대하 소설이다. 소설의 배경은 1900년대 초반 가난한 농부 왕룽과 부잣집 하녀 오란의 결혼으로 시작되어 3남 왕싼의 죽음으로 끝나는 약 60년 정도의 얘기지만, 소설에서는 약 30년 정도로 줄여서 실제로 1940년 이전에 끝나도록 구성하였다. 소설의 자세한 요약과 나의 감상문은 따로 홈피의 ‘26저널에 올려놓았으니 관심있는 친구들은 읽어보기 바란다. 우리 4명의 느낀 점과 이슈는 다양했지만, 간단하게나마 아래의 몇가지를 토론하였다. 첫째, 본 소설의 주인공은 왕룽 à 왕싼 (왕룽의 3) à 왕위안 (왕싼의 아들)으로 이어지는 3대이고, 소설의 첫부분은 왕룽의 움막에서 오란과 혼인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마지막 부분은 늙은 왕싼이 바로 그 움막에서 아들 왕위안과 메이링의 간호를 받으면서 죽는 것으로 끝난다. 즉 소설의 제목답게 대지에서 시작해 대지에서 끝나는 내용이다. 둘째, 본 소설은 1900년대 중국 근대의 정치 사회적 변천사를 얘기하고 있지만, 영화는 미국에서 만들어진 영화 <The Good Earth>는 허리우드의 텃세 탓에 모두 미국배우들이 주연을 맡았고, 중국에서는 영화화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중국 정부의 통제하에서 가슴아픈 과거의 중국역사, 예를 들어 너무도 가난한 중국의 농촌, 여러 번의 혁명, 지방 군벌과 화적떼들의 어지러운 싸움들 그리고 아편으로 퇴폐해가는 부자들의 삶등을 영화속에서 보여주기 싫어서가 아니었을까? 셋째. 위안이 미국 유학중에 만나서 사랑하게되는 메리 윌슨은 펄벅 본인의 모습을 그렸고 펄벅 본인의 불구자 딸 때문에 가슴아파했기에 왕룽의 천치딸을 등장시켜 괴로움을 간접적으로 표현했을 것이며, 넷째, 펄벅 자신이 진정 원했던 여성상은 비록 고아 출신이지만 봉건적 사회에서 벗어난 자유분방하고 총명한 고아출신 의사 메이링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우리들의 일치된 결론은 자식들은 부모가 원하는대로 거의 따라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왕룽이 큰 기대를 갖고 농부가 되기를 원했던 3남 왕싼은 지방 군벌이 되었고, 마찬가지로 왕싼이 그토록 정성들여 키운 아들 왕위안은 군인대신 농부가 되기를 원했다.

<대지>에 대한 토론을 마치고 우리는 다시 부천역에서 전철을 타고 인천역으로 향했다. 놀랍게도 나는 인천역을 오늘 난생 처음 방문했다. 업무상 출장으로 동인천역이나 제물포역에는 서너번 왔었으나, 인천역은 정말 처음이어서 감동이 컸다. 정창섭 동기가 미리 예매한 덕분에 우리는 힘 안들이고 인천역근처 China Town 건너편에 있는 승강장에서 2량짜리 모노레일 월미바다열차를 타고 월미도를 한바퀴 도는 관광을 했다. 월미도는 인천 앞바다의 섬으로써 6.25때 연합군이 처음 상륙한 곳이라는 Green Beach라는 표지석이 있다. 상륙하기 직전 함대에서 쏘아댄 집중포화에 섬에 있던 대부분의 민가와 북괴의 진지들은 완전 초토화되었다고 한다. 인천항에서 제법 멀리 떨어져있었던 월미도는 지속적인 매립작업 덕분에 이제는 완전한 육지가 되었다. 월미도 한가운데에 있는 월미공원은 한국전쟁 중에는 UN군이, 이후 50년동안 국군이 주둔하다가 2001년에 시민에게 개방되었다. 모노레일에서 보니 인천항에서 수출을 기다리는 수천대의 중고자동차를 볼수 있었고 특히 인상적인(?) 것은 거의 폐차직전의 화물 트럭도 많이 보였는데, 바다열차 안내원의 대답이 아프리카 후진국에서는 승용차보다 트럭의 인기가 높다고 한다. 우리가 정말 못살던 50~60년 전, 일본이나 미국의 중고차를 수리해서 타던 시발택시가 생각난다.

KakaoTalk_20201028_185607364_25.jpg

KakaoTalk_20201028_204149113_08.jpg

KakaoTalk_20201028_190928998_11.jpgKakaoTalk_20201028_185607364_05.jpg

각설하고, 우리는 월미문화의거리역에서 내려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가을바다를 만끽하고 회덮밥과 소주한잔으로 옛날 얘기를 하면서 때늦은 점심식사를 즐겼다. 점점 낮이 짧아지는 가을 날씨 탓에 환할 때 자유공원과 차이나타운을 구경하기 위해서 우리는 서둘렀다. 더구나 인천항으로 돌아가는 모노레일은 코로나사태로 일정인원 이상은 승선이 안되어서 걷기 좋아하는 우리들은 월미공원을 가로질러 인천역까지 걷기로 했다. 지자체 덕분에 둘레길들은 정말 정비가 잘 되어있고 이정표도 확실해서 길 잃어버릴 염려는 안해도 되었다. 한중문화관에서 잠시 중국역사체험을 하고, 자유공원으로 향했다. 맥아더 동상으로 유명한 자유공원언덕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계단은 일본의 조계(1883년 조성)와 청나라 조계(1884년 조성)의 경계이다. 언덕 중간에는 중국에서 기증한 공자상이 서있고, 언덕 위에는 신미양요(1882) 100주년을 기념하는 기념비도 세워져 있고,근처에 거대한 맥아더 장군 동상이 우뚝 서 있다. 건립 연도를 보니 1957, 우리가 3살 때, 6.25 전쟁이 종료된 4년후 이승만박사의 지시로 세웠으리라. 이승만대통령 입장에서는 만주에 원자폭탄을 투하해서 중공군의 본부를 타격하자는 맥아더의 결단이 너무나 고마웠을테고 이 때문에 맥아더를 해임한 해리 트루만 대통령이 얼마나 야속했을지 충분히 이해가 가고, 그래서 인천앞바다가 보이는 자유공원 정상에 맥아더 동상을 세웠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오늘을 마무리할 시간, 날씨는 어둑어둑헤지고 우리의 마지막 목적지China Town은 자유공원바로 아래, 소설 삼국지를 그린 100여개의 벽화를 감상하며 점점 어두워지는 언덕길을 내려가 China Town에 도착, 20여년전 인천시 기획관리실장으로 근무했던 정창섭 동기가 당시 인천시장과 서너번 왔었다는 중국음식점 만다복(萬多福)에서 백년짜장면으로 저녁식사를 했다. 물론 김민주와 나는 당연히 소주 한잔을 했고. 온통 붉은색과 황금색으로 장식한 차이나 타운, 코로나 탓인지 저녁 시간인데도 별로 사람이 없어서 쓸쓸해보였다. 만권당 모임을 시작하고 4번째 만남, 저녁까지 함께 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아침 10시에 만나 하루종일 친구들과 함께 한 시간, 원래 펄벅의 <대지> 3부작을 논하는 시간이었지만, 어찌하다보니 인천, 부천시 탐방겸 야유회가 되었다. 서울로 향하는 전철안에서는 모두들 꾸벅꾸벅 잠에 빠졌다. 시원한 바닷바람 맞으며 즐긴 오늘 참 멋진 하루였다. 저녁 8시에 용산역 도착, 오늘 우리들은 10시간을 함께 했다. 웬만한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진정으로 사랑한 펄벅 여사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우리의 다음달 모임을 고대하며, 친구들, 오늘 진정 즐거운 시간이었다네~~^^


게시글이 어떠셨나요?



다른 이모티콘을 한번 더 클릭하시면 수정됩니다.
화살표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