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UNTER

  • 총 회원수
    595 명
  • 금일 방문자
    97 명
  • 총 방문자
    450,693 명

2024년 2월 만권당 후기 히샴 마타르의 <귀환> 토론

20242월 만권당 후기: 히샴 마타르의 귀환을 읽고

 

일시: 2024220일 화요일 오전 10:303:00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이태원 마라케시 식당(모로코식)

참석자: 김민주, 백웅기, 손영일, 우영우, 정창섭, 서형원(초청 게스트)

 

1. 게스트와 함께한 2월 모임

눈이 녹아서 비가 된다는 우수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아서 그런지 오전 내내 쌀쌀하면서도 흐린 날씨였지만 만권당의 토론 분위기는 시종일관 진지하면서도 열기가 있었다.

이번 달에는 아프리카 문학 라운드(2023.112024.2)의 대미를 장식하기 위해, 마그레브 지역 국가인 리비아 출신 작가 히샴 마타르의 귀환: 아버지와 아들의 땅을 읽고 토론했다. 사실 리비아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나라는 아니다. 카다피라는 독재자가 있었고, 동아건설이 리비아 대수로 공사에 참여하여 사막에서 지중해 연안까지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물길을 개척했다는 정도의 지식만 있었다. [토론을 시작하기 전에 참석자들에게 리비아라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3개씩 제출하도록 했는데, 카다피가 4, 사막이 4, 대수로가 3, 지중해가 3명이었고, 롬멜, 키레네, 트리폴리, 공포가 각 1명으로 집계되었다.]

이처럼 리비아에 대한 배경지식이 부족하던 차에 다행히 창섭이 서형원 동기가 과거에 리비아 트리폴리 한국대사관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라고 알려주어서 그를 이번 모임의 특별 게스트로 초청했다. 이날 참석한 형원이는 19929월부터 19941월까지 15개월 동안 트리폴리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했다고 하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토론의 첫 주제는 작품의 시대적, 지리적 배경이다. 작품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단골 주제로 등장한다. 형원이는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가 독재자의 마성을 드러내기 시작한 90년대에 트리폴리에 거주한 덕분에 이 주제에 관해서는 생생하게 현장감을 더해 가면서 술술 이야기보따리를 풀어갔다. 리비아가 질 좋은 경질유 수출을 기반으로 아프리카의 최빈국에서 최고의 부자 국가로 성장한 스토리부터 한국대사가 카다피의 텐트에서 그를 만난 이야기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가 이어졌다.

국립중앙박물관 카페에서 토론.jpg

마침 토론 장소가 국립중앙박물관 2층에 있는 카페이었기에 토론을 마친 후에는 기증으로 만나는 세한도, ·정조의 탕탕평평: 글과 그림의 힘, 스투파의 숲: 신비로운 인도 이야기의 특별전을 모두 관람할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1시간에 특별전 세 개를 모두 관람하기는 시간이 빠듯했지만, 눈에 확 들어오는 유물들을 사진과 머릿속에 담아왔다.

세한도.jpg

특별전_탕탕평평.jpg

스투파의 숲.jpg

특별전 관람까지 마치니 시계는 어느덧 1시를 향하고 있었고, 갑자기 허기가 몰려왔다. 민주가 찾아낸 이태원역 부근의 마라케시 식당(MARRAKECH RESTAURANT: MOROCCAN CUISINE)으로 갔다. 주인이 모로코인이며, 예전에는 식당 이름이 마라케시 나이트였다고 한다. 리비아 작품을 읽고 왜 모로코 식당에 갔냐고? 간단한 이유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지. 서울에서 리비아 식당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민주가 페북에 리비아 문학작품을 토론한 후에 모로코 식당에 갔다고 하니까, 한 페친이 한국 소설 읽고 나서 일식 먹으러 가는 격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리비아와 모로코 간에 공통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두 나라는 모두 마그레브(이집트의 서쪽, 해 지는 쪽의 지중해 연안 국가들) 지역에 속해있어서 지중해식 파스타인 쿠스쿠스 같은 음식은 모두 먹는다. 아무튼 우리는 모로코 빵, 호무스, 타진, 쿠스쿠스, 미트볼 등을 배부르게 먹었다. 이에 더해 리비아 기분을 내기 위해 히샴 마타르의 소설 남자들의 나라에 나오는 하리싸 소스를 조금 달라고 해서 빵을 찍어 맛을 보았다. 엄청나게 짜고 매웠다. 3월에는 민주 주관 아래 무민(Moomin)’으로 유명한 핀란드 작가 토베 얀손의 위험한 여름을 읽기로 하고 헤어졌다.

마라케쉬 식당 오찬.jpg

 

2. 작가 히샴 마타르

오늘의 작가 히샴 마타르는 카다피 독재 치하에서 리비아의 현실을 다룬 소설 남자들의 나라에서2006년 맨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르면서 자신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렸다. 만권당이 읽은 귀환은 소설 형식을 띠고 있는 히샴 마타르의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의 글솜씨가 워낙 빼어나기 때문에 훌륭한 문학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이 책은 2017년에 퓰리처상(논픽션 부문)을 수상했으며 30여 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작가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그는 1970년에 리비아인 부모가 외교관으로 부임한 뉴욕에서 태어나서 1973년 세 살 때 트리폴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아홉 살 때, 아버지가 카다피 정권의 눈 밖에 나면서 가족 모두 이집트의 카이로로 도피해서 열다섯 살 때까지 그곳에서 살다가 영국으로 건너가 공부를 계속했다. 1990, 아버지가 이집트 비밀경찰에 납치되어 리비아 비밀경찰에 넘겨졌을 때 히샴 마타르는 골드스미스 대학의 건축학도였다. 그 후 인디펜던트지 등에 아버지에 대한 깊은 그리움과 회한, 그리고 남아 있는 가족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을 술회하는 에세이를 기고했고, 위에 언급한 남자들의 나라에서를 통해 문단에 데뷔했다.

 

3. 작품 귀환

아버지와 아들의 땅이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카다피 독재 정권의 치하에서 아버지 실종에 얽힌 시대의 진실을 찾아 나선 아들의 여정을 그렸다. 작품은 20123월에 한 남자가 어머니, 아내와 함께 카이로 국제공항에서 리비아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작가는 아홉 살이던 1979년에 부모와 함께 리비아를 탈출한 후, 카이로, 나이로비, 런던 등지에서 살았다.

히샴 마타르의 아버지 자발라 마타르는 1939년생으로 청년 장교였다가 카다피가 집권한 후 강제 퇴역을 당했고, 뉴욕에서 외교관으로 재직했다. 자발라는 사업 수완이 좋아 적지 않은 돈을 모으기도 했으며, 따르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카다피 정권의 실체를 알아챈 후 정권에 협조하지 않고 저항 세력을 규합한 반체제 인사가 되었다. 1990312일에 자발라 마타르는 카이로에서 이집트 비밀경찰에게 체포되어 카다피에게 넘겨졌다. 1993년에 처음으로 아버지의 편지가 전달되었고, 가족들은 아버지가 리비아의 악명 높은 아부살림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로부터 세 통의 편지를 받았지만, 1996년 이후에는 그마저 소식이 끊겼다. 그리고 1996629, 악명 높은 아부살림에서 1,270명의 정치범들이 학살당했다. 이날 학살 현장에서 아버지를 보았다는 증언이 있기도 했지만, 2002년에 아버지를 감옥에서 보았다는 증언도 있었다. 그에게 아버지는 죽었을 수도, 죽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희망과 절망, 의심과 체념이 함께 하는 시간이었다.

히샴 마타르는 사실을 알아내고, 아버지의 생사 확인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리비아로 돌아갔다. 2011년에 카다피는 몰락했지만, 아버지는 돌아오지 못했다. 대신 그의 아들이 아버지의 나라에 돌아가서 그의 흔적을 찾으려고 한다. 아버지 실종에 얽힌 시대의 진실을 찾아 나선 아들의 머나먼 여정 이것이 귀환의 이야기다.

 

4. 토론

(1) 귀환의 시대적, 지리적 배경과 카다피에 관해서 알아보자.

 

- 시대적 배경은 196991일 청년 장교 카다피가 이드리스 국왕을 퇴위시킨 후 권력 장악한 때부터 그가 사망한 20111020일까지 42년에 집중되어 있다.

- 지리적 배경은 지중해 남쪽 리비아 해안에서 가까운 트리폴리부터 벵가지까지다. 서쪽 트리폴리 부근은 남쪽으로 약 100km가 평야 지대이고 그 아래부터 사하라 사막이 시작되지만, 동부 해안지대는 해안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부터 산과 사막이 시작된다. 사하라 사막은 약 100m 정도 융기된 곳에 위치한다. 트리폴리는 건조한 곳이 많지만 벵가지에는 물이 흐르는 곳이 꽤 있다.

- 카다피의 출생지는 시르테 근처로 유목인인 베두인족 일파인 카다파 부족의 한 가문에서 태어나 전통적인 베두인식 이슬람 종교 교육을 받으면서 자랐다. 부모는 무학이며 가난한 환경에서 여러 형제와 친척들과 함께 성장했으나 그는 유독 공부와 출세에 대한 의욕이 남달랐다. 1963년에 벵가지의 리비아 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여 동기들과 왕정 타도를 목표로 하는 자유장교단을 조직하였다. 1965년에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한 카다피는 영국으로 유학 겸 1년간 파견근무를 떠났고, 귀국한 다음 통신부대로 배치되었다. 1969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은 카다피는 자신의 친족이나 같은 부족 출신 인사들을 적극 기용하면서 시르테는 정권의 강력한 지지 기반이 되었다.

 

(2) 히샴은 실종된 아버지를 생각면서 나는 적어도 자기 집에서 서서히 나이를 먹어가는 아버지처럼 그런 어떤 행복한 남자가 있기를 바랐다. ... 25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아버지의 밝혀지지 않은 죽음과 침묵을 계속해서 견뎌내고 있다.”, “장례식에 담긴 종결의 의미가 부럽다. 나는 그런 확실한 것을 갈망한다.”라고 술회했다. 25년이란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지 않고 선명하게 남아있는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 히샴에게 이런 갈망을 일으킨 요인은 무엇일까?

 

- 아버지 생각을 거의 매일 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의 종착지는 장례식일 텐데, 히샴에게는 그런 기억이 없다. 그러니 나는 그런 확실한 것을 갈망한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히샴에게 이런 갈망을 일으킨 요인은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형성된 존경심과 사랑 때문일 것이다.

- 3대에 걸친 DNA적 요소가 있다. 3대 모두 자국에서 생명이 위태로워지자 해외 망명을 택했다. 히샴에게는 작가 의식이 많이 있었다. 아버지가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 확실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생각을 더 많이 한 것으로 보인다.

- 실종이나 부재 때문이 아닐까?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 확인이 안 된 상태에서 아버지를 보내지 못하는 아들의 애끓는 사부곡이라 할까. 감옥에서의 치욕과 고통 속에서 소식이 끊어진 상태가 주는 두려움과 고통, 그리고 죄책감 등의 발로가 요인이었을 것이다.

-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진실, 즉 아버지가 자신과 가족들을 희생시킴으로써 밝히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밝힘으로써 아버지를 다시 세상에 귀환시켜 구천을 떠돌 아버지의 영혼을 영원한 안식처에 머물게 하고 싶은 아들 히샴의 마음이 요인이었을 것이다. 다른 한편 카타피 독재 정권에 납치되고 유린되었던 리비아의 아픈 역사를 소환하려는 것도 요인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 생사를 알 수 없게 사라진 아버지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리움  때문이 아닐까.

-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본다. 하나는 특수한 측면인데, 커다란 정치적 사건에 희생된 아버지의 생사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인권 단체 및 지지 세력과의 교감을 통해 자기 강화된 열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일반적 측면인데, 국가가 가족의 삶을 보장하지 않기 때문에 리비아 특유의 부족주의와 가족주의로부터 그러한 열망이 생겨났을 것이다.

 

(3) 가족이 아버지 자발라에게 카다피를 공개적으로 반대하지 말라고 설득할 때 그는 리비아와 싸우려 하지 마라. 너희가 늘 질 거야.”라고 했고, 히샴은 자발라의 말에 대해 국가는 가족이라는 사적 실재와 대립 관계에 있었다.”라고 했다. 국가와 가족이 대립 관계에 놓여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행동하겠는가? 이 문제에 대한 정답은 있는가?

 

- 정답은 없다. 머리는 국가가 우선이라고 하지만, 마음은 가족이 우선이라고 말할 것 같다. 자발라도 우선 가족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켜 놓고 반체제 활동을 계속한 것을 보면 마음의 소리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 초창기 한국가톨릭교회 지도자의 한 사람인 황사영이 신유박해의 전말과 그 대응책을 帛書에 적어 중국 북경의 주교에게 보내고자 했는데 발각되어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백서는 종주국인 청나라 황제에게 청하여 조선도 서양인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할 것을 요청하였고, 아니면 조선을 청나라의 한 성()으로 편입시켜 감독하게 하거나, 서양의 배 수백 척과 군대 56만 명을 조선에 보내어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도록 조정을 굴복하게 하는 방안 등을 제시하였다. 국가와 가족의 대립처럼 황사영 역시 국가와 신앙 사이의 대립을 보인 것으로 사료된다. 이런 문제는 우리 삶 속에서 일어날 수 있으며 무엇이 더 중요한지 정답은 없다.

- 폭압적인 국가에 대해 자신을 지키는 것과 그에 대항하는 것 간에 항상 고민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국가와 부족, 국가와 가족 간에 선택해야 한다면 많은 사람이 가족을 많이 선택할 것이다.

- 조국을 떠나거나 떠나지 않은 것, 둘 다 옳았다. 정답은 없다.

- 가족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기에 가족을 먼저 생각하겠다. 국가를 위해 싸우는 것도 가족을 지키기 위함이다고 생각한다.

 

(4) 히샴의 삼촌 마흐무드, 흐마드 외삼촌, 사촌 살레와 알리는 모두 아부살림 감옥에 수감되어 있으면서 먼저 잡혀 온 자발라를 만났다. 그를 직접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자발라임을 확인하기 위해 마흐무드는 암호를 물어보았는데 상대방은 난 블로타에서 왔어라고 답한다. 블로타에서 온 것이 어떻게 암호가 될 수 있었을까?

 

- 암호는 반드시 알아야 하는 사람과만 공유하고 타인은 몰라야 한다. 히샴의 집안은 아지다비야에서 여러 세대를 살았지만, 사막 쪽으로 30킬로미터쯤 더 깊숙이 들어간 곳에 그 집안의 우물이 있었다. 매우 은밀하게 숨겨진 그 집안만의 오래된 공간이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사막 한가운데를 깊게 파서 만든 저수지 두 개는 부족한 빗물을 저장하는 장소로 그곳 이름이 블로타였다. 블로타는 히샴 집안사람들만 아는 장소였기 때문에 암호로 제격이었다.

 

(5) 무아마르 카다피는 이집트의 2대 대통령인 나세르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치 이력에 나타난 두 사람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가?

 

- 공통점: 자유장교단 쿠테타로 인한 왕정 종식, 군부 독재, 아랍 사회주의, 사관학교 출신, 산업/사업의 국유화 (석유산업, 수에즈운하 사업), 범아랍주의, 민족주의 표방, 反美. 이스라엘, 국가의 경제성장에 기여, 근대화 추진 등

- 차이점: 카다피는 독재로 갔으나 나세르는 그렇지 않았다.

 

(6) 할아버지 하메드는 이탈리아의 식민지 탄압이 강해졌을 때 알렉산드리아로 피난을 갔고, 아버지 자발라는 독재자 카다피의 눈을 피해 카이로로 피난을 갔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리비아를 떠난 이유는 무엇인가?

 

- 하메드 할아버지는 1911년 이탈리아군의 리비아 침공 직후 오마르 알무크타르의 지휘 아래 있던 동부 지역 저항군에 가담했다. 그러나 8년 후인 1919년 갑자기 어린 가족들을 데리고 급히 서둘러 알렉산드리아로 도피했다. 히샴은 할아버지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히샴은 자기 할아버지가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가능성을 제시하지만, 설득력이 없다. 할아버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사업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 아버지는 가족을 보호하고 해외에서 투쟁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해서 그리 했을 것이다.

- 탄압이 심해 가족의 안위를 위해 피신을 해서 기회를 보자는 계획이었을 것이다.

- 사랑하는 조국 리비아를 지키려는 투쟁을 위해 일시적 피난처로서 선택한 것이 아닐까?

- 할아버지(하메드): 오마르 알무크타르 휘하에서 독립투쟁 알렉산드리아로 피신, 아버지(자발라): 시인 군인 외교관 카다피 투쟁 카이로로 피신

영화 사막의 라이온의 실제 주인공 오마르 알무크타르는 이탈리아군에 잡혀 교수형을 당할 때 나는 절대 항복하지 않는다. 승리 아니면 죽음이다. 투쟁은 다음 세대, 다다음 세대에도 이어질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7) 독재와 억압에 대한 저항의 피가 할아버지 하메드부터 히샴까지 집안 3대에 걸쳐 흐르고 있다. 또한 탁월한 문학적 소양 역시 3대를 이어오고 있다. 이러한 연유로 인해 세 사람 모두 국민으로부터 상당한 지지와 찬사를 받았는데, 이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기질 덕분인가?

 

- 대대로 내려오는 저항 정신과 문학적 분위기가 있는 집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본다.

- 타고난 기질에 보고 듣고 배운 삶의 가르침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 유전적 요인과 더불어 가정적 환경 즉 대화, , 무언의 행동을 통해 배우는 측면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서로 영향을 미치고 서로를 생각하는 방식들은 늘 은근슬쩍 곁에서 움직이는 방식이었다. 스스로 스며들 듯 번져 나가는 엎질러진 우유의 이미지다.”

우리나라에도 정치 가문이 있다.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의 손자인 이종찬(11·12·13·14대 국회의원, 초대 국가정보원장)을 예로 들 수 있다. 그의 작은할아버지는 성재 이시영 초대 부통령이며, 부친은 독립운동가 이규학이며 어머니는 흥선대원군의 외손녀 조계진이다. 이종찬은 제16·17·18·19·20대 국회의원인 이종걸의 사촌 형이다. 이시영 부통령은 대한제국 초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낸 김홍집의 사위이며 백사 이항복의 직계 10대손이다.

 

(8) 리비아는 역사적으로 트리폴리타니아, 키레나이카, 페잔으로 구분되어 있다. 무아마르 카다피의 고향인 시르테는 트리폴리타니아 지방에 속하기 때문에 벵가지를 중심으로 한 키레나이카 지방과 오랜 정치적 갈등 관계에 있었다. 튀니지에서 시작한 <아랍의 봄> 같은 민중의 저항이 도화선이 되었겠지만, 20112월에 발발한 리비아 내전은 이런 지역 갈등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 리비아 내전의 한 원인은 지역과 부족 갈등이라고 할 수 있다. 카다피는 트리폴리타니아의 시르테 부근에 거주하는 베두인족의 일파인 카다파 부족의 가문에서 태어나 전통적인 베두인식 이슬람 종교 교육을 받으면서 자랐다. 따라서 키레나이카의 벵가지 사람들과는 상당히 다른 출신 배경을 가졌다. 이런 이질적 문화와 정치가 내전의 한 원인이 되었다.

- 동서 간의 갈등이 중요한 원인이었다. 트리폴리(카다피 중심) vs. 벵가지 (반체제 중심)

- 리비아의 전통적인 수도는 벵가지였다. 1969년에 카다피가 집권한 이후 수도를 벵가지에서 트리폴리로 이전한 후 벵가지는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 카다피 사망 후에 발생한 내전도 동쪽(벵가지 중심)과 서쪽(트리폴리 중심)의 종족 간의 갈등의 영향이라고 본다.

 

(9) 즐리텐 전투에서 사망한 미르완, 트리폴리 전투에서 사망한 이조와 오른쪽 다리와 왼쪽 폐에 총상을 입은 하메드 등 수많은 젊은이가 반체제 투쟁을 위한 리비아 내전에서 죽거나 중상을 입었다. 리비아는 이런 희생 위에 성공적으로 국내 정치의 안정화와 민주화를 달성했는가? 그렇지 않다면 원인은 무엇일까?

 

- 그렇지 않다. 리비아는 지난 2011아랍의 봄혁명 여파로 무아마르 카다피 정권이 무너진 뒤 정치적으로 동서로 분열돼 있다. 리비아는 유엔과 서방이 인정한 과도정부 리비아 통합정부(GNU)가 서부를, 군벌 리비아국민군(LNA)이 동부를 나눠 장악하고 있다.

- 종족 간의 갈등에서 비롯된 이해관계로 인해 새로운 갈등과 다툼이 발생하고 있는 것 같다.

- 혁명 세력 내부의 파벌 다툼, 카타피 잔당세력의 암중모색, 극단적 이슬람 군사 세력 IS의 침투, 그리고 산유국 리비아를 둘러싼 서방국가들의 복잡한 셈법이 지금도 리비아를 참혹한 전쟁과 분쟁의 땅으로 몰아가고 있다.

 

(10) 히샴은 티치아노의 성 로렌스의 순교(베니스, 산타 마리아 아순타 성당)를 보기 위해 로마에서 열린 전시회에 갔다. 그림에서 히샴은 평상을 만든 목수를 생각했고, 그에게 물 한 잔을 건네는 딸을 보았다. 그 외에 자신의 역할을 열심히 하고 있는 사람들도 보았다. 히샴은 그림을 쳐다보고 공책에 스케치하면서 아버지의 마지막 순간들에 대한 소리와 이미지들이 날카로운 파편으로 날아와 내 주위를 둘러쌌음을 느꼈다. 아버지는 그것들을 통해 무엇을 들었을까?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무슨 말을 했을까? 그때 아버지에게 지나온 과거는 어떻게 보였을까?”라고 말했다. 과연 그가 이 그림을 보면서 아버지의 마지막 순간에 대해 느낀 것은 무엇이었을까?

 1141_Tiziano Vecelli_The Martyrdom of Saint Lawrence.jpg

- 깊은 구렁텅이에서 울려 나오는 울음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성 로렌스는 오랜 시간 동안 화형을 당하는 죽음을 맞이했고 마침내 '다 이루었다' 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 집사의 순교도 이와 유사했으리라.

- 히샴은 티치아노 그림에서 순교하는 성 로렌스를 자신의 아버지로 보았을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 들리는 비명과 날카로운 파편들이 그림에서는 어둠으로 표현되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마지막 말은 성 로렌스라 하늘을 향해 손을 뻗으며 부르짖는 마지막 기도가 아니었을까? “주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십자가에서 마지막 말씀을 마치신 예수님처럼 하나님. 불쌍한 리비아를 구해주옵소서라는 아버지의 기도를 들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지나온 과거도 순교자처럼 살아오지 않았을까? 정의를 위해 불의와 싸우면서 말이다.

 

(11) 마네의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이 아부살림 감옥에서 대학살의 날에 아버지 처형에 대해 갖는 개연성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jpg

- 아부살림 감옥에 수용되었던 1,270명의 정치범들은 마치 막시밀리안 황제가 처형당한 것처럼 어느 날 교도소 안마당으로 끌려 나와 무참히 총살당했다. 아부살림에 수감되었던 자발라가 이때의 학살을 피했을 가능성은 없었을 것이다.

- 가까운 사람이 죽을 때에 영감을 느낀다고 믿는 저자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알리게 하는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 배신을 당해 처형당한 막시밀리안의 이야기는 아메리카와 유럽 곳곳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에 비유되며 퍼져나갔다. 에두아르 마네는 막시밀리안의 죽음을 그리면서 그림 속 군인들의 옷을 멕시코 군복이 아니라 프랑스 군복으로 그리기도 했는데, 그의 죽음에 나폴레옹 3세의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12) 세이프 카다피는 자발라의 생사에 관한 충분한 정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히샴에게 끝까지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을까?

 

- 무아마르 카다피의 아들 세이프는 당연히 자발라의 생사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자발라가 옥중에서 사망했거나 1996년 아부살림 학살에서 죽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민중 사이에서 소요가 일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세이프에게는 자발라의 생사에 관한 소식을 히샴에게 알려준다는 것이 대단히 복잡한 문제였을 것이다.

- 시간 끌기와 이집트 연루 물타기 작전

- 자발라의 죽음과 관련된 끔찍한 학살의 만행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줌으로 인해 자신이 누리고 있는 카다피 정권의 권력과 정권의 위신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시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독재 정권이 자발라의 시신을 이미 유기했기 때문에 계속 시간만 끌었다. 1977년에 당시 중학생이던 일본인 요코타 메구미가 북한에 의해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북한의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은 2002년 북일 정상회담에서 그녀의 납북 사실을 인정하고 메구미가 자살했다고 주장했다. 이후 북한은 200411월 제3차 북일 협상 시 메구미의 유골을 전달했으나 유전자 검사 결과 다른 사람의 것으로 드러나면서 논란이 일었다. 시신이 없기 때문에 메구미가 사망했다고 말한 것이 또 다른 문제를 초래했다. 세이프도 이런 점에 유념하여 히샴에게 자발라가 사망했다고 알려주지 않았을 것이다.

 

(13) 히샴 마타르가 2006년에 저술한 남자들의 나라에서는 반체제 작가로서 전 세계에 그의 이름을 알렸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독재자 카다피에게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문학가가 작품으로써 현실정치에 영향을 미쳤던 사례를 이야기해보자.

 

-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1975년에 발표된 시로 당시에 민주주의를 갈망하던 대학생, 지식인과 민중에게 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이 시가 쓰인 1970년대는 민주주의 운동에 각종 탄압이 들어가고, 박정희가 유신헌법을 발표하는 매우 암울한 시기였다.

- 김지하의 <오적>. 이 시에 등장하는 오적의 구체적 정체는 재벌, 국회의원, 고급 공무원, 장성, ·차관이다. 김지하는 이들 다섯 인물 유형의 한자 표기를 개견()’()가 들어가는 새로운 조어로 표기함으로써 그들을 동물화했다. 이 시의 구체적인 배경은 60년대 후반의 한국 사회인데, 시인은 국민 대다수가 가난하게 살고 있음에도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은 이들 오적은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 비판하기 위해 이 시를 썼다. 특히 이 시에는 오적외에도 부정부패를 척결해야 할 임무를 맡은 포도대장이 등장한다. 경찰이나 사법당국을 상징하는 포도대장은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기는 커녕 오적에게 매수되어 죄 없는 국민을 투옥하는 권력의 앞잡이로 등장한다. 결국 포도대장은 날벼락을 맞고 갑작스럽게 죽는데, 이는 고전소설의 권선징악을 차용하여 경찰과 사법당국을 비판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김지하의 이 작품을 게재했다는 이유로 사상계는 폐간되었고, 작가와 편집인 등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14) 우리나라도 한국전쟁 이후 5.16 군사정변과 12.12 군사반란이라는 정변을 겪은 후 민주화를 이룩했다. 리비아와는 달리 우리나라가 민주화에 성공한 이유가 있다면 무엇일까?

 

- 우리는 19932월엥 출범한 김영삼 대통령 정부를 최초의 문민정부라고 한다. 그 이전까지는 군인정부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문민정부의 싹은 1987년부터 움트기 시작했다. 1987년 초에 박종철 고문치사사건(1987.1.14.)을 계기로 6월 항쟁이 발생했으며, 그 결과 6.29 선언이 나왔다. 당시 국민의 민주화와 직선제 개헌 요구는 엄청나게 거셌는데, 결국 여야 합의에 따라 국회에서 의결된 헌법 개정안은 19871029일에 확정·공포되었다. 개정된 헌법에 따라 대통령직선제 등을 통하여 권위주의적인 정부형태가 민주화되었다. 이런 결과가 있었던 것은 국민의 높은 교육 수준으로 인해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잘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 여러 가지 이유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깨어있는 국민, 지도자(김영삼의 자민당 합류, 김대중 김종필의 합류로 지역 갈등 해소), 경제적 발전 등을 들 수 있다

- 부족 갈등이 없는 반면 교육열이 높았고 인적자본이 풍부했다.

- 자유 민주주의 헌법에 의한 국가 건설, 든든한 중산층의 형성, 국민들의 민주화 의식, 풀뿌리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는 지방자치 실시, 보수와 진보 진영 간 타협 정치, 민주주의 연착륙 성공(1990122일에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연합하여 자유민주당 탄생, 1997113일 김대중을 필두로 한 새정치국민회의와 김종필을 필두로 한 자유민주연합이 공동 여당의 목표를 가지고 결성한 DJP 연합 등)

게시글이 어떠셨나요?



다른 이모티콘을 한번 더 클릭하시면 수정됩니다.
    좌장 웅기의 세심한 자료정리를 통해 상대적으로 우리에게 덜 알려진 북아프리카 특히 리비아에 대해 이해를 넓힐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군사독재자에 의해 순교자가 된 아버지(동시에 리비아 그자체)를 그리워하는 아들의 섬세한 문학적 터치를 통해 유사한 경험을 했던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도 더욱 발전하였으면 하는 바램도 가져본다.
    작가의 불행한 가정사를 통해 리비아의 아픔이 전해지네요. 형원이의 현지 경험담이 리비아의 현실을 생생하게 아는데 도움이 됐어요. 토론 과정을 잘 정리해 준 웅기에게 감사해요. 그리고 작가의 글 솜씨가 대단합니다. 강추합니다~~
    꼼꼼하게 잘 정리된 후기군요. 참석자의 의견들을 빠짐없이 잘 반영했고 모든 일정도 잘 기록했군요.  수고 많았어요.
화살표TOP